녹음이 우거진 봄의 끝자락, 경남 고성에 있는 박용태 작가님의 작업실을 방문했습니다. 정성스레 내어주신 차를 마시며 《여백의 만滿》 전시를 앞두고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찬찬히 주고받아보았어요. 오랫동안 이어온 작품관부터 자연의 흐름이 깃든 작업 과정까지. 작가의 깊고도 너른 세계를 여기 나누어봅니다. Q. 2018년 TWL에서 열린 <중천의 빛, 천광요>展에서 작가님의 작품을 처음 선보였어요. 그 후 4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코로나라는 워낙 큰 변수도 있었고요. 그동안 작업과 생활에서 변화한 것이 있을까요?A. 세상이 혼란스러웠죠. 저에게는 그리 큰 변화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창작자가 계속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에 따라 쉬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작업해왔습니다. Q. 작업을 안 하는 시간에는 무얼 하세요? A. 작업실 옆에 정원을 가꾸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꽃을 꺾어 차실에 꽂아두는 걸 좋아합니다. 차실에서는 차 마시고, 가끔 붓글씨 연습도 하지요. Q. 작가님이 도예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A. 20대 초반에 어느 잡지에 실린 도자기 한 점을 본 적이 있어요. 그때 운명처럼 이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죠. 2002년 집에 전기가마를 들이고 작업을 시작했는데, 그때는 원하는 만큼 결과물을 내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4년 뒤 장작가마를 짓고 요장을 꾸려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섰습니다. 전공자도 아니고 축적된 경험이 없다 보니 처음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늦은 시작을 극복하기 위해서 한 달에 한 번씩 가마 소성을 했습니다. 이렇게 2~3년 정도 실패를 반복하며 차츰 감을 잡게 된 것 같아요. 초반에는 여러 장르의 도자기 작업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최종적으로 ‘백’이라는 무한색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흙과 유약, 소성하는 날 불의 흐름 등의 총합으로 회백, 홍백, 청백, 황백, 설백처럼 다양한 색이 나죠. 백자에는 색이 아주 많습니다. Q. 이전에 유약을 만들 때는 조개껍데기를 사용한다고 알려주셔서, 바다와 가까운 고성의 지역성이 반영된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반면 가마에 사용하는 소나무는 전국 각지에서 수배하신다고 들었어요. 재료 수배와 성형, 소성 모두를 고전적인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은 꽤 고된 작업일 것이라 짐작됩니다. 그런데도 이를 고수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A. 저는 백자 작업에서 밝은 백색도만 좇지는 않아요. 흙이 가진 고유의 성질이 있고 그게 불과 만나 나타나는 자연스러움을 피력하고자 하는데요. 하동 백토는 높은 화도에서 기물을 조금 더 견디게 해주고, 흙 속에 있는 미량의 철분이 낮은 백색도를 조성하기 때문에 이 점을 살려서 작업하고 있습니다. 어패류나 나무재 등의 자연 재료를 연구하고 사용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Q. 창작자의 작업은 매일 작은 완결을 이루면서 답을 구하는 과정이자 더 큰 질문을 찾는 여정이라 보입니다. 작가님이 이르고자 하는 궁극적인 이상이나 목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A. 꼭 작업에 국한하지 않아도 살아간다는 것이 자연에 순응하는 일인 듯합니다. 흩어진 흙을 하나의 사물로 만들어내며 이 세상에 쓸모없는 것을 남기지 않으려고 해요. 내가 하는 작업이 자연에 잘 묻어 흘러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Q. 작가님의 작업을 오래 지켜보고 곁에 두며 받은 인상도 말씀하신 내용과 결을 같이 합니다. 애써서 무언가를 드러내려고 하기보다는 고요함과 편안함이 있었어요.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 백자 기물에서 받게 되는 정서도 그런 심성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A. 모든 것에서 영감을 얻지만, 조선백자에서 답을 구할 때가 많아요. 좋은 백자는 지금 봐도 아주 세련되고 고고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이번 전시회에서 선보이는 백자 향합과 박쥐문 연적은 조선시대의 유물을 복각하는 작업이기도 했어요. Q. 오랜만의 전시라 반갑게 찾아주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이는 기물이나 문양이 있을까요? 전시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작가님의 이야기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A. 작품이든 도구든 감상자와 사물 사이의 공명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기형이나 용도를 특정하지 않고, 만들고 싶은 마음을 따라 작업하고 있어요. 지난 일 년간 전시로 선보일만한 완성작을 계속 축적해 두었습니다. 달항아리와 편병처럼 큰 기물을 만들고 싶어서 작업했고, 복잡한 기형이나 시간이 많이 드는 작업도 머리를 식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며 만들었어요. 말하다 보니 가마에 들어있는 작업이 떠오르네요. 전시 전에 소성이 한 번 더 남았는데, 장작 가마는 소성 후 소실률이 보통 30~40% 정도 되니까 열어봐야 아는 거죠. Q. 장작 가마에서의 성공 비율은 항상 그 정도일까요? A. 처음에는 작품이 5~10%만 나왔어요. 장작 가마는 가마를 채우는 최소 작업량이 많기도 하지만, 소성 준비를 할 때도 시간을 계속 할애해야 하는 노동이에요. 지금은 일 년에 서너 번 정도 소성을 하고 있습니다. 계절과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면서 작업을 하다 보면 무언가가 보이는데 그게 재미있어요. 힘들어도 작업을 계속하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이번 전시 작품 일부는 겨울에 소성했는데, 겨울에는 가마에 찬 기운이 들어가서 빙열이 많이 나요. 그건 또 그것대로 좋습니다. 시인 김상옥 선생님의 〈백자부〉란 시가 있죠? 마지막 구절에 “불 속에 구워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빙열이 간 표면이 얼음 같은 살결이라고 묘사된 거죠. Q. 마지막으로 이번 전시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A. 작업을 시작한 지 20년 정도가 되었는데 아직도 ‘무엇이 정답이다’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세상이 어지러우니 제가 만든 작품이 좀 위로가 되면 좋겠습니다. 《여백의 만滿 - 박용태 작품전》은 2022년 6월 19일까지 한남동 handle with care에서 진행됩니다.☞ 전시 소개 자세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