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하얀 머리를 가진 작업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포 작가는 늘 주변을 살피며 자신의 속도로 묵묵히 걸어왔습니다. 경쟁이나 비교에서 한 발짝 물러나, 모든 과정을 즐기며 오롯이 작업에 집중한 하루하루가 쌓였습니다. 새해를 맞은 1월의 초입, 핸들위드케어에서 두 번째 전시를 준비하는 포 작가가 건네온 진솔한 이야기를 여기 나누어봅니다. 작가가 걸어온 길 위에 남겨진 시간과 고민, 그리고 작업에 대한 깊은 애정을 함께 느낄 수 있길 바랍니다. Q. 안녕하세요, 작가님. 2023년 여름 핸들위드케어에서 진행한 《백 년의 사물》 작품전 이후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A. 몇 권의 책을 읽었고, 아침엔 간간이 달리기를 하고, 산책하며 오리와 백로와 물고기를 보고, 꺾인 풀과 낙엽으로 매일 일기를 썼어요. 매일 작업을 했고요. Q. 지난 인터뷰에서 평소 일상 루틴를 공유해주셨죠. 작업실 근처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숨을 고르고, 숲을 산책하며 동물과 식물을 관찰하는 일. 작가님의 일과는 살짝 엿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지는 기분입니다. 요즘처럼 추운 겨울에도 여전히 같은 하루를 보내고 계신가요? A. 겨울의 계곡 얼음 밑으로 흐르는 물을 보고, 하얗게 눈 쌓인 숲을 보고, 작업실 앞 눈을 치우고, 눈사람을 만들었어요. 여전히 같고 매일 새롭습니다. Q. 스튜디오 포를 줄곧 ‘Poetry of Metal: 금속으로 쓴 시’라고 소개해 오셨어요. 포의 작품을 ‘시時’로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A. 문자로 시를 써내듯 저는 금속으로 순간과 영원을 말하고 싶어요. 꺾인 풀, 벌레 먹은 잎, 말라가는 낙엽이 제겐 애틋하고 때로는 아름답습니다. 우리 각각의 삶에서 일어나는 의도치 않으나 아름다운 순간을 응축된 시로 적어내듯이, 저도 자연의 그 순간들을 영원의 물성을 가진 금속으로 담아내고 싶어요. Q. ‘포包’는 ‘감싸다’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연약한 사물과 가슴 저린 현재는 금속이라는 단단한 물성과 작가님의 마음이 깃들어 한 작품으로 탄생하지요. 실제로 강건한 평온을 전하는 일은 작가님이 지향하는 작업의 가치이기도 합니다. ‘여리면서도 강한’ 상반되는 두 속성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A. 몇 년 전 숲을 걷다가, 긴 가지 끝 여린 줄기가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꺾여있는 것을 조심히 들어 작업실로 가져왔어요. 다시 생명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 여린 삶을 금속이라는 강한 물성으로요. 형태는 꺾일듯 흔들리듯 애틋하지만, 그 무엇보다 강건한 존재이길 바라요. 그 풀이 어쩌면 저처럼 느껴졌는지 몰라요. Q. 지난 전시에서는 오랜 시간 수집해 온 빈티지 기물과 이에 영감을 받은 금속 작업을 소개하며 영속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Second Breath》에서는 어떤 작품과 이야기를 마주할 수 있을지 많은 분이 기대하고 계세요. 이번 전시에 대해 자세히 설명 부탁드립니다. A. 처음 지금 작업실에 이사 오던 날은 마침 이번 전시와 같은 2월이었고, 새벽부터 눈이 많이 오고 있었어요. 대충 짐을 정리하고 다음 날, 인적이 없는 숲으로 처음 발길을 옮겨 긴 호흡을 하며 걸었습니다. 그렇게 작업을 해온 몇 해, 계절을 걸으며 만들어 온 낙엽과 풀들, 그 첫 작업들을 시간의 더께를 입은 그대로 모두어 보았습니다. 이른 아침 제가 만난 풀숲의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요. 작업실 옆 삼백 년 늙은 벚나무가 찬란하게 벚꽃을 피우는 순간이 얼마나 벅찼는지 이야기해 주고 싶어요. 세상에서 떨어져나와 그 첫 호흡을 하며 걸었던 순간을 기억하며 이제 숨을 가다듬고 두 번째 호흡을 준비합니다. Q. 작업실 근처 숲에서 발견한 떡갈나무와 그 아래 보물처럼 떨어진 도토리, 비바람에 꺾인 나뭇가지, 어느 봄날 발등에 내려앉은 보드라운 목련 꽃잎…. 작가님은 일상에서 우연히 마주친 무수한 자연물을 작품으로 만드시지요. 결코 완벽하지 않은 우리 곁의 일상적인 자연을 작업의 주된 영감으로 삼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A. 가을 떡갈나무잎의 개구진 곡선, 도토리 껍질의 매끄럽고 섬세한 결, 이른 봄 목련의 도톰하고 보송한 꽃잎. 한 가지에 어느 잎 하나 똑같이 생긴 것이 없고 잎맥 하나 같은 것이 없어요. 모두 제각각 자신의 지도를 가지고, 정확한 때에 망설임 없이 푸른 잎을 내고, 벌레 먹고, 낙엽이 되고, 말라가고, 다시 땅이 되는 모든 과정이 아름답다 느껴요.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낙엽과 제 삶의 과정이 다르지 않다고 느끼죠. 결국 저는 저의 이야기, 저의 과정과 나이 들어가는 모든 찬란한 순간들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Q. 가끔은 운명적 만남을 기대하며 1년을 기다려 자연물을 수집하기도 하신다고요. 최근 작업실 근처에서 새롭게 발견한 자연물과 이에서 비롯된 작업 에피소드가 있다면 공유해 주세요.A. 저와 서사가 있는 자연물로 만들고 있어요. 작년엔 튤립 잎 하나를 드디어 얻었습니다. 작업실로 걸어오다 보면 튤립이 피는 길이 있어요. 참 우아하다 생각했는데 한 해가 지나고 가을쯤, 튤립의 작은 잎 하나가 하얗고 투명할 정도로 아름답게 말라 있었어요. 가만히 가져와 이번에 전시의 인센스 스틱 홀더로 만들었습니다. Q. 은 다관, 주석으로 만든 능선 거름망, 느티나무잎 황동 잔받침 등 여러 금속을 사용해 작업하시지요. 작품마다 금속의 종류를 달리 선택하는 작가님만의 기준이 있을까요? 각 재료로 작품을 만들었을 때의 고유한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A. 각 금속이 갖는 느낌과 표현되는 정서가 조금씩 달라요. 그리고 작품의 쓰임에 따라 적절한 물성의 금속으로 작업하려고 합니다. 은銀은 강도가 좋고 은은한 빛이 어린다고 할까요. 예민하고 순수한 성격을 가진 기품 있는 사람같이 느껴져요. 주석은 가장 인간적인 금속이라고 느껴요. 무르지만 변색에는 강해서 쓰임에도 편합니다. 서글서글하고 편안한 정서를 담을 수 있는 친구 같은 물성이라 생각합니다. 황동을 다루다 보면 성실하고 유연한 감각을 갖게 돼요. 첫 질감은 명랑하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중후한 표면의 변화가 매력적인 금속이라 느끼고 있고요. Q. 질감을 내는 일에 푹 빠져 계시다는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차를 마시며 작업 스케치를 하는 저녁이 설렌다는 이야기도 보았죠. 늘 즐기며 일하는 작가님이기에 모든 시간이 행복할 것을 알지만, 그래도 작업 중 가장 좋아하는 과정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혹은 요즘에 가장 좋아하는 과정이랄지요!A. 스케치도 왁스 작업도 주조도 세공도 모두 좋아해요. 모든 작업의 순간이 더하고 덜하지 않게 몰입이 돼요. 걸으며 수집하는 순간부터 어떤 것으로 만들어낼지, 어떤 금속으로 표현할지 고민하고 만들어 가는 모든 과정이 하나같아요. 그렇게 만들어 쓰이는 순간까지, 그리고 누군가 소중한 이에게 전해져 사용되는 순간까지가 저에겐 모두 하나의 서사가 돼요. Q. 금속뿐만 아니라 한지 공예, 최근에는 죽공예 작업까지 하고 계시죠. 은 댓살을 만들어 엮은 작품은 사진으로만 보아도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오롯이 전해지더라고요. 이처럼 다양한 분야의 공예를 끊임없이 배우고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직접 경험하면서 발견한 금속 공예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면요? A. 무언가를 일부러 하지는 못하는 편이에요. 궁금하고 너무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할 때 작업도 마음도 순조로운 편입니다. 금속 주조 작업은 긴 원본 작업과 왁스 작업 후에 뜨겁게 녹인 금속 액체를 부어 만드는 과정으로, 그 주조에 따라 그동안의 작업이 모두 나오지 않을 수도 있어요. 대담함과 비우는 마음이 필요하죠. 대나무는 하나하나 짜는 과정이 쌓여 만들어져요. 서두름을 경계하고 성실하고 한결같은 태도를 익히게 돼요. Q. 이번 전시 <Second Breath>는 작가님 작업의 궤적을 돌아보고 잠시 숨을 고르는 쉼표와도 같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시간을 천천히 돌아보았을 때, 스스로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으신가요?A. 제 책상에는 금속공예를 익히며 처음으로 땜한 작업이 늘 놓여 있습니다. 그 첫 작은 땜에서 지금의 전시까지 하루도 작업을 놓은 날이 없어요. 성실함이라기보다는 설레지 않은 날이 드물었을 만큼 작업이 즐겁습니다. 매일의 기술적인 숙련은 생각을 자유롭게 하지만 관성에 빠지게도 합니다. 제가 만들어온 삶의 관성에서 잠시 벗어나 두 번째 호흡을 천천히 고르며, 고개를 들어 지금 걸어온 길의 풍경을 바라봅니다. 돌아보면 기적같은 날들과 과분한 마음들이 저를 순풍처럼 밀어주었습니다. 모든 잎사귀 하나하나 만드는 것이 도전이었어요. 작은 잎맥들을 만들며 하나하나 다른, 참 섬세한 지도를 갖고 있구나 생각했어요. 아마도 매일의 작업을 통해 제가 가진 지도를 찾아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람도 서로 다 다른 지도를 갖고 살고 있다는 것도 인정하면서요. 지금 들고 있는 저의 지도는 선명하지 않아요. 그래서 만들어갈 모든 실수마저 기꺼이 받아들이고 감수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무릎에 첫 힘을 주고 걷는 아이처럼 다시 엉성하고 애틋하게 걸으라 말해주고 싶어요. 해왔던 일에 능숙한 어른으로만 남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처음 하는 일들에 설레는 아이처럼 기꺼이 넘어지며 걸으라 말해주고 싶어요. Q. 전시를 찾는 관람객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려요.A. 오시는 한분 한분께 이 전시가 분주함과 소란스러움에서 잠시 벗어나 차분히 '두 번째 숨'을 고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Q. 2025년 새해, 작가님이 계획하신 일이나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야기 나눠주세요.A. 아침마다 책을 조금 더 오래 읽고 싶어요. 아침 달리기를 좀 더 오래하고 싶어요. 멍하니 있는 시간을 자주 갖고 싶어요.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는 주저하지 않고 즉시 움직이고 싶어요. 누군가 얘기할 때 아무 말 없이 들어주고 싶어요. 이렇게 하고 있다면 아, 잘 살고 있다 느낄 것 같아요. 그거면 좋을 것 같아요. 포包°의 작품전 《Second Breath》는 2025년 2월 1일부터 16일까지, 녹사평 티더블유엘 4층 handle with care 에서 진행됩니다. Editor 오송현Photo 이승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