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ulnerable, Blue, Champagne
아이보리앤그레이 작품전
투명하고 서늘한 공기의 계절, 아이보리앤그레이의 작품전 《Vulnerable, Blue, Champagne》을 시작합니다.
새벽의 여명과 같은 블루는 저물어가는 한 해를 돌아보는 마음에, 가볍게 흩날려 사라지다 이내 고요하게 쌓여가는 눈 雪 속에, 어제와 오늘 미세하게 달라지는 대기에 고이고 흐르며 모양을 바꿔갑니다.
아이보리앤그레이는 블루라는 색에 주목하여 시간과 삶의 축에 깃든 연약한 순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합니다. 왕혜원 작가는 《Becoming Winter》 시리즈로 계절의 흐름과 삶의 공간을 건축적인 시각으로 표현합니다.
임수정 작가는 식물의 잎과 꽃, 나무가 지닌 색소를 조합한 《leaf's drawing》을 새롭게 선보입니다. 이국의 토양과 기후의 기억을 안고 보틀 안에서 발효된 샴페인과 장미 꽃잎이 만나 탄생한 임수정 작가의 신작 셔츠 또한 이번 전시에서 소개합니다.
아이보리앤그레이
아이보리앤그레이는 건축디자이너 왕혜원과 패션디자이너 임수정의 Design Studio&Studies입니다. 왕혜원은 《Becoming》 시리즈를 통해 건축적 물성과 일상의 순간을 조우시키는 작업을, 임수정은 《leaf's drawing》을 통해 살아있는 풍경과 컬러를 구현하는 작업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 제목인 《Vulnerable, Blue, Champagne》을 직접 지어주셨어요. 세 개의 단어가 직관적이면서도 함축적으로 다가옵니다. 제목과 작품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 나눠주실 수 있으실까요?
왕혜원: 서늘한 블루는 겨울로 접어드는, 마음 속 계절의 시간과 삶의 중심이 되는 공간의 관계를 상상했을 때 가장 마음에 새롭게 와닿는 색이었습니다. 일찍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겨울 오후의 서늘한 블루에는 사라짐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한편, 눈이 내리기를 기다리는 듯한 따뜻함과 어떠한 가벼움도 있는 듯합니다. 그러한 연약한 나자신을 마주하는 감성적, 물성적 상태가 지금은 가장 아름다워 보입니다.
임수정: 이번엔 전시 타이틀을 굉장히 드라이하게, 작업내용만을 요약해서 짓고 싶었습니다. 너무 더운 여름을 보낸 탓인지 일체의 은유나 미사여구를 사용하지 않고, 그저 쉽고 담백하고 직관적으로 저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들을 표현한 작업 내용과 작업에 사용한 재료들을 적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왜 ‘연약함’, ‘블루’가 좋게 다가왔을까, 거슬러 추론을 해보니 아마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아름답게 외로운 상태라고 해야 할까요? 다른 생명체의 방해 없이 충분히 연약한 나의 정서적 본성을 즐길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 타인과 명확한 실루엣이 보이지 않는 정도의 서늘한 거리를 두고 살아가고 싶다는 갈망은 예전부터 해오던 생각입니다.
날씨에, 바람에, 빛에, 소소한 것들에 큰 영향을 받는 사람이 되어 갔으면 합니다. 저희가 주목한 ‘연약함’은 이런 의미에 가깝습니다. 샴페인은 이번 셔츠를 만드는 작업 중에 샴페인으로 컬러 작업을 한 작업들이 있었기 때문에 타이틀에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전시작인 《becoming pieces》, 《leaf’s drawing》는 어떤 정의를 따르거나 정지해 있는 이미지보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의 아름다운 한 순간을 보여줍니다. 문자로 쓴 시 詩 는 발화하는 순간 언어의 사회적 함의가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반면 두 분의 작품에 담긴 것은 우리가 살아가며 우연히 마주하는 시적 장면과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어나 메시지의 억압은 없지만 ‘지금 이 곳에 서서 작품을 바라보는 존재인 나’는 오롯히 감각할 수 있는데 그 감각은 산책과 여행길에서 시선을 빼앗기는 어떤 순간과 닮았습니다. 두 분은 실제로 산책이나 작업실을 벗어난 장소에 가셨을 때 영감을 얻는 편이신지, 혹은 오히려 일상으로 돌아오고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모티브가 떠오르는 편이신지요?
왕혜원: 새로움을 발견하는 순간도 일상에서 그냥 지나치는 생각들처럼 마음속에 묻혀 있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모티브는 마음의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하며 마음이 이끄는데로 실험해 본 습작들에서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임수정: 모든 것이 뒤엉켜 있는 것 같습니다. 최대한 많은 것에서 영감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편이고, 상상하는것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여서 항상 머리속이 여러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산책이나 여행은 영감을 얻기보다는 오히려 그런것들을 다 비워내기 위한 과정 같아요. 그래서 작업을 하기 위해서 거의 매일 산책을 나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돌아와 작업 책상에 앉았을 때, 머리와 마음 속에 잡념이 없고 내자신이 가벼워졌다고 생각되었을 때 비로소 제 손이 시적인 그림을 그려주더라구요.
한편, 두 분은 아이보리앤그레이 라는 이름으로 프로젝트 유닛을 결성하시기 전부터 오랫동안 패션 디자이너와 건축 디자이너로 활동하셨어요. 패션 디자인과 자연, 자연과 건축은 작품 속에서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지 궁금합니다. 예를 들어 패브릭 드로잉 작업을 하시는 임수정 작가님의 작업에서는 패션 디자인을 하실 때의 감각이, 왕혜원 작가님이 비커밍 시리즈에서 다양한 재료를 접목하실 때 건축적인 시각이 연결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왕혜원: 건축디자이너로 일해오면서, 상반적인 재료의 조합이 공간에서 새롭게 형상화되는 것이 늘 놀라웠습니다. 공간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크게 보면 자연의 일부이며, 공간을 형상화하는 것은 작업에서 새로운 자연의 질서를 발견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임수정: 사실 저는 제 작업에서 자연이 큰 화두가 되는 것을 조금 경계하는 편입니다. 자연과 나자신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고 제 작업도 실상은 잎이나 자연의 서사를 담고 있다기 보다는 제 자신의 모습을 담아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것을 큰소리내서 말하는 것이 쑥쓰럽다고 해야할까요?) 패션이라는 범주보다는 이제는 ‘옷을 만드는 작업’에 더 천천히 집중하게 되는 스테이지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가벼운 수의(壽衣)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습니다. 조금 더 나이가 들면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수의와 자연처럼 아름다운 관계가 또 있을까요?
왕혜원 작가님은 건축적 영감을 다양한 재료로 표현하는 《becoming》 시리즈를 전개해 오셨어요. 마유산의 흙으로 만든 큐브 형태 작업, 파이버 페이스트와 한지로 만든 Paper Cake 코스터, 파이버 페이스트와 아크릴 페인트 작업까지 폭넓은 재료의 융합과 표현 방식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파이버 페이스트와 아크릴 페인트 작업인 《becoming》 시리즈의 새 캔버스 작업을 선보입니다. 작품의 모티브를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제 작업의 가장 큰 주제는 ‘Becoming’입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Becoming Winter》 작업을 통해 겨울의 풍경적, 정서적 요소인 눈과 얼은 물, 차가움 등을 세밀히 들여다보며 느끼게 되는 감성적 변화와 새로우면서도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형상과 물성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동일 시리즈의 한지 작업은 흙이 떠오르는 색감과 저마다 다른 농담이 독특합니다. 운동성이 있는 바람의 존재보다는 주변을 둘러싸는 공기(Air)의 감각을 상상해보기도 하고, 오래된 시간을 머금은 장소나 공간이 주는 편안함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작업 모티브나 주제가 있다면 이야기 나눠주실 수 있을까요?
한지는 다른 색감과 재료를 사용하였지만 저에게는 서늘한 블루에서 오는 또다른 느낌과 맞닿아 있다고 느껴집니다. 《Becoming Winter》의 또 다른 한지 작업에서 뷰어들은 어떠한 느낌을 가지실지 궁금합니다.
뜨거운 계절을 떠나보내고 다가올 긴 겨울을 맞이하는 짧은 축복의 시간, 푸르스름한 고요 속에 피어오르는 작은 기쁨의 기포를 듣고 보는 시간이 되길 기원합니다.
2024년 10월 25일 - 2024년 10월 27일
Fri - Sun, 12 - 7 PM
서울시 녹사평대로 40나길 34 4층 Handle with Care
02-797-0151
전시 기획: Handle with Care
포스터 디자인: 이재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