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사이
이수빈 작품전
수목의 생애를 묵상하며 마음을 유순하게 만드는 모양을 조각하는 이수빈 작가. 23년을 여는 첫 전시로 작가의 첫 번째 개인전을 함께한 이후 여섯 계절이 지났습니다. 긴 여름을 지나 마침내 찾아온 가을을 배경으로, 오래된 사이에서만 나눌 수 있는 사랑의 형태와 질감과 촉감을 담은 작품들을 다시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수빈
나무를 깎아 온화하고 부드러운 조각을 만듭니다. 문장을 다듬어 이야기 짓는 게 좋아 에디터로 일했고, 모호한 덩어리를 깎아 의미를 맺어주는 게 좋아 나무 깎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로 동물과 사람을 모티브로 한 작은 조각 작품과 서가 용품, 오브제 등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Q. 작가님이 직접 지어주신 올해 전시 제목은 《오래된 사이》입니다. 처음 들었을 때 다정하고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표현이라 느껴졌어요. 타이틀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A. 전시를 준비하면서 올해에는 작년과 다른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인위적인 주제를 끌어오고 싶지는 않았고 제가 그간 작업한 시간을 돌아봤습니다. 나는 왜 작업을 하는지, 주로 뭘 표현하는지,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되짚었습니다.
주로 동물을 모티브로 한 조각을 많이 해온 만큼 ‘왜 동물인가’ 하는 질문으로 시작해보면 동물이 상징하는 순진하고 무구한 아름다움, 그리고 다정함이 있더라고요. 또한 동물을 단순한 표현의 대상으로 대상화하기보다 관계의 상대로 바라보고 관계 맺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양이 한 마리, 곰 한 마리를 조각하더라도 언제나 그 친구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거나, ‘자기에게 집중한 상태이지만 세상에 관한 애정을 잃지 않았다’는 상상을 해보게 되거든요. 제 작업의 바탕이 그처럼 ‘상대가 존재하는 감정’이라고 생각하기에, 그 관계성에 집중한 조각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전시의 주제를 정하고 어떤 말로 묶을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제가 조각으로 표현하는 동물은 오래전부터 우리 곁에 있었던 오래된 존재라는 점, 또한 인간과 비인간 동물, 사람과 사람, 동물과 동물의 관계성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이 타이틀이 떠올랐습니다. ‘오래된 사이’라는 말 속에는 시간이 깃들어 있습니다. 시간은 많은 것을 잇고 쌓아줘요. 나무가 또 다른 무엇이 되기까지, 달랐던 두 존재가 서로를 이해하기까지의 시간도 함께 담고 싶었습니다.
Q. 이번 전시 제목과 동명의 작품인 〈오래된 사이〉는 전시 포스터에 등장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작품과 함께 전해주신 작품 노트를 보니, 시골집 아버님의 산에서 수령이 오래되고 병들어 베어온 고목을 작업실에 가져오신 후 오래 보관하셨다고 적혀있었어요. 많은 동물 중에서도 늑대와 양을 골라 조각하신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A. 아버지가 베어둔 감나무는 원래 껍질이 붙어 있었어요. 일 년 반이 지나도록 두었다가 어느 날 눈에 띄어 ‘아 오늘은 얘를 깎아봐야겠다’ 싶었습니다. 마른 껍질을 벗겨내려고 톱질을 했는데 속살이 회색이더라고요. 늑대를 깎은 건 그 빛깔 때문이었어요. 감나무의 미색이나, 감나무의 타닌 성분이 환경과 반응해 먹이 든 듯 검어지는 먹감나무와도 달라서 낯설었거든요. 그 위에 늑대와는 적대적 관계일 양을 올린 것은, 늑대와 양처럼 ‘서로 다가설 수 없는 상대가 서로를 이해하는 한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바라본 아버지는 때로 고집스럽고 무서운 분이었는데, 성인이 되어 아버지가 평생 일군 산을 보자니 가지런히 심어진 나무, 살뜰히 보살핀 구석구석에 아버지의 다정함과 고요함이 배어 있더라고요. 수십 년 전 아버지가 심었고, 키웠고, 그러나 병들어 베어낸 나무에 그 오랜 시간이 담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무를 심을 때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제가 이렇게나 자라 아버지의 고집스러움과 고요함을 이제 내 안에서도 발견하게 된 거예요. 오묘하게 물든 그 회색은 아주 오래 걸려 서로를 이해하게 된 어느 순간의 빛깔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Q. 전시 준비를 하며 전시작을 한 자리에 모아두고, 나무의 색과 무늬가 이렇게나 다양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인식하기도 했어요. 스팔티드 목재의 상흔이 고유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작품도 아름답지만, 일반 목재의 다양한 수종이 모였을 때 어우러지는 색과 무늬가 나무가 지닌 본연의 따스함과 매력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 나무마다의 매력이 다르겠지만 작가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나무는 무엇인지, 반면 작업 소재로 다루기에 가장 까다로운 수종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A. 작품마다 다릅니다만, 보통은 작업 과정에서 떠올린 ‘첫 생각’에서 출발해 얼개를 갖춰갈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산책> 시리즈는 ‘사람과 동물이, 동물과 동물이 함께 산책한다’ 같은 한 문장을 떠올리고 그걸 출발점으로 삼았어요. ‘둘은 어떻게 갈까?-목말을 태우고’, ‘눈을 가리고 싶어-왜?’, ‘보고 싶지 않은 게 있으니까’, ‘그럴 땐 같이 가는 존재가 대신 눈이 되어 줘.’ 이런 식으로요. 이렇게 얼개를 갖춰가면서 작품의 디자인도 애초에 생각한 것과 달라질 때가 있고요.
이야기는 작업을 다 마친 후에야 글로 정리합니다. 이 과정에서 생각이 더 간결해지거나 덧붙여지기도 해요. 저는 작업을 할 때 세밀하게 칼자국을 남기며 깎아가는 걸 좋아해서 실제 나무를 깎는 작업의 시간도 긴 편입니다만, 이렇게 맥락을 찾아가기까지도 제법 시간이 걸려요. 그렇게 상상하며 이야기를 찾아가다 보면 어느새 눈앞에 놓인 최초의 나무는 또 다른 무언가가 되어 있지요.
Q. 작년 전시인 《우연의 벽》 에서는 벽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곁에 있어주는 동물 친구들을 표현한 작품이 주를 이루었어요. 올해는 월 행잉 작품 뿐 아니라 스탠딩 오브제, 행잉 타입의 작품도 눈에 띕니다. 올해 새롭게 작업하신 오브제에 관해 소개 부탁드려요.
A. 작업을 계속해 나가면서 일어나는 변화가 있어요. 관심 있는 주제는 더 짙어지지만 표현의 방식에서는 다른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지난 일 년여간 다양한 방식의 작업을 해보았던 터라 이번 전시에서도 월 행잉 스타일만 고집하기보다는 더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우연의 벽》 전시 때 선보인 월 행잉 작품의 변주뿐만 아니라 조각의 가장 기본 형태라고 볼 수도 있는 스탠딩 타입을 만들었어요.
행잉 타입의 경우 관심은 있었지만 중심이 되는 조각 외에 부수적인 장식 요소가 필요한데 어떤 소재를 더하고, 어떤 느낌을 담을지가 고민이었습니다. 얇게 켠 나무를 습기에 쪄서 휘는 방식의 ‘습식 우드밴딩’을 경험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 방식을 접목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 행잉 오브제는 그렇게 작업했어요. 전체적으로 다양한 타입의 작품들이 어우러져 공간을 채우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작가는 수십 번의 계절을 묵묵히 지나온 나무를 마주하며 우리 모두에게 있을 오래된 존재를 떠올렸습니다. 발견될 때까지 나무 속에서 긴 잠을 잔 이야기들은 저마다의 결과 색을 언어 삼아 오랜 기억을 재현합니다. 사계절처럼 변함없이 지속될 것이라 여겼던 삶의 방정식이 정신 없이 변해가는 시기. 각자의 오래된 사이를 떠올리고, 오래될 사이를 만나며, 다른 두 존재가 서로를 이해하는 동안 쌓인 시간의 더께를 다독이는 자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2024년 9월 27일 - 2024년 10월 13일
Tue - Sun, 12 - 7 PM (Monday Closed)
서울시 녹사평대로 40나길 34 4층 Handle with Care
02-797-0151
전시 기획: Handle with Care
포스터와 리플렛 디자인: 이재민
식물 연출: Botalabo 정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