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에 수북이 낙엽이 쌓이는 가을의 끝자락, 남미혜 작가님과 서면으로 긴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먼지 속에 있던 수십 년 전 자개가 어떻게 새로운 빛을 얻게 되었는지, 그간 궁금했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어요. 책상 위에 놓인 문양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일부터 세상을 빼곡히 이루는 찬란한 무늬를 발견하는 기쁨까지. 진솔했던 그날의 대화를 여기 나누어 봅니다. Q. 핸들위드케어에서의 지난 전시, 《오롯이 우주》 에서는 자개가 지닌 고요함에 집중했다고 말씀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이번 《무늬예찬》에서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자개 작품을 선보이게 되었는데요.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A. 〈나전월광문반〉이라는 작업을 시작할 즈음이니까 2016년 무렵부터 일 거예요. 재료나 도구를 사러 왕십리에 있는 자개 공방을 자주 찾았습니다. 주로 붓이나 아교 등을 사기 위해서였는데, 갈 때마다 공방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잔뜩 쌓여있는 종이 더미가 궁금했어요. 새, 꽃, 사슴, 풍경… 언제 만든 건지도 모를 자개 도안이었죠. 저는 수집하는 게 많아요. 예뻐 보여서 모으는 것도 있고, 물건 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가 궁금해서 일단 보관해두는 것도 많은 편입니다. 이건 호더들의 특징이기도 한데, 언젠가는 다 쓸 곳이 있다고 믿거든요. (웃음) 그렇게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구겨진 채 쌓여있는 것들을 6년간 하나씩 사들여 150여 점의 자개 도안을 모았습니다. 모아놓고 보니 하나씩 화면 위에 옮겨서 분류해 보고 싶어졌어요. 디자이너의 근본 없는 사명감 같은 것도 있고요. 사람들의 눈에서 멀어져 버린 걸 보면, 어떻게든 그게 가진 매력을 밖으로 꺼내서 주인공으로 만들고 싶거든요. ‘이렇게 예쁜 무늬들이 왜 먼지 속에 쌓여있어야만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싶었어요. Q. 이번 작업은 일본 유학 시절의 전공과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지요? 당시 어떤 연구를 하셨는지 궁금해요. A. 일본 나가노현에 가루이자와(軽井沢)라는 지역이 있어요. 오래전부터 피서지로 사랑받는 곳으로 19세기 말부터 〈가루이자와보리軽井沢彫〉 라는 목조(木彫)가구가 제작되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시작으로 유럽 각국에서 많은 외국인이 일본에 들어와 선교하거나 새로운 학문 등을 가르치게 되는데요. 그들이 머무는 공간에서 사용하기 위한 가구를 제작하다 보니, 시작부터 서양식 가구로서 존재하게 된 것이 이 〈가루이자와보리〉 예요. 사회 및 문화적으로 큰 변화를 겪으며 새로운 일자리가 필요했던 사람들이 이 가구의 제작에 뛰어들었고, 가구 전면에 대나무, 벚꽃 등을 모티브로 얕은 조각을 잔뜩 새겨넣은 것이 특징인데, 역사적으로도, 조형적, 공예적 기술 면에서 봐도 연구자로서 흥미로운 대상이었어요. 그런데 이 가구에 대해 아직 제대로 연구한 사람이 없고, 지역 주민들마저도 어떠한 역사를 가졌는지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나니 일종의 사명감이 생겼습니다. (웃음) 그때부터 가루이자와보리 가구를 중심으로 서로 다른 문화가 맞부딪히며 나타나는 공간 및 가구 양식과 산업의 변화에 관해, 나아가 조형적 변화 안에서 보이는 장식과 문양에 관해 연구하고 지역 장인들과 함께 디자인 워크숍을 진행했어요. 그동안 깊이 연구된 적이 없다는 건 그만큼 자료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연구 초반에는 가루이자와를 비롯해 일본 각지를 다니면서 가구는 물론이고 사진, 문헌, 오래된 신문 기사나 수백 년 전 공문서까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다 싶으면 모조리 수집했어요. 저는 연구뿐만 아니라 어떤 작업을 하든지 최대한 영역을 넓게 두고 관련 자료를 모으려고 해요. 그렇게 모은 것들을 한자리에 펼쳐놓고 보면 분명 숨겨져 있던 흐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Q. 작품의 소재가 된 자개 도안이 대부분 40년 이상 오래된 자개라고 들었어요. 이 자개를 선택하신 작가님의 기준이 있을까요?A. 시대의 소용돌이 안에서 돌연변이처럼 나타나는 조형적 특징과 문양을 향한 관심은 앞으로도 저의 작업에 있어 중요한 주제가 될 것 같습니다. 1970년대 고도의 경제 성장과 함께 자개장은 고가의 혼수품으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수요가 급속도로 많아지면서 생산 체계에도 변화가 필요했고, 서울 왕십리를 중심으로 수많은 자개장 공장이 생겨났어요. 대량생산에는 반드시 규격화와 분업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같은 문양을 단번에 수십, 수백 장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요. 당시의 나전 문양은 구전되어 온 이야기를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분업 작업으로 공장에서 공장으로, 장인에서 장인으로 도안이 전달되면서 다른 장르의 표현법과 기술을 응용하여 사용하거나 독자적인 해석을 더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원형이 변형되기도 하고 사라져 버리기도 합니다. 게다가 단단한 재료를 실톱으로 오려내는 작업의 특성상 문양의 일부분이 생략되거나 나전의 특성에 맞는 형태로 새롭게 디자인되어야 했죠. 그런데 이런 자개장의 인기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어요. 곳곳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더 심플하고 세련된 가구를 찾았고, 크고 육중하고 화려한 자개장은 한순간에 그들의 눈에서 멀어졌습니다. ‘나전’이라는 소재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부터 항상 이 시기의 이야기에 마음이 끌렸어요. Q. 수십 년 전 가구에 사용되었던 자개를 찾아 새로운 작품으로 재구성하셨어요.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자개 조각을 다듬는 일종의 복원 과정이 녹록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작가님에게 ‘재구성’은 어떤 의미일까요?A. 올해 봄부터 본격적으로 전시를 위한 작업에 들어갔어요. '예쁘다', '귀엽다' 하면서 모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직접 작업을 하려고 보니 예상치 못한 문제가 많았습니다. 일단 자개에 붙어있는 먼지와 풀, 그리고 정체 모를 찌꺼기를 깨끗이 닦아내는 게 관건이었어요. 뭘 이렇게 많이 모았나 스스로 원망하기도 했어요. 150여 개의 문양 뒷면을 다 닦아내고 나서 보니까 계절이 바뀌어 있더군요. (웃음) 한때 커다란 가구의 한 면을 메우기 위해 만들어진 문양을 지금의 생활 안에서도 예뻐하며 바라볼 수 있으려면, 모여있던 것을 분해하거나 멀리 떨어져 있던 것들의 거리를 좁히는 작업은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번 작업을 하면서 제가 재구성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굳이 설명하자면 잠시 끊겨있던 시간을 미약하게나마 제 손으로 이어 보고 싶었습니다. 이번 전시가 수십 년 전 만들어졌던 문양의 시간과 오늘의 무늬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연결을 상상하게 하는 가교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Q, 작품 제작과정을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A. 모든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전통적으로 자개를 다루는 방법에 제 맘대로 응용한 방법이 섞여 있어요. 자개 뒷면에 붙어있던 이물질을 모두 닦아내고 나면 각각의 문양을 그대로 두거나, 분해하거나, 새롭게 조합해 얇은 종이 위에 덧붙여 화면을 완성합니다. 이어서 자개의 종류와 두께에 따라 작은 붓을 이용해 밝은색의 도료를 얇게 여러 번 밑칠합니다. 자개의 발색을 좋게 하고 울퉁불퉁한 면을 고르게 만드는 중요한 과정인데, 이때 사용하는 도료는 작업마다 가장 알맞은 색상으로 직접 조색하고 있어요. 나무 위에 아교로 문양을 옮겨 붙인 다음에는 실험용 확대경을 통해 문양을 구석구석 보면서 문양 위에 붙어있던 종이와 여분의 아교, 풀, 문양 밖으로 나온 칠을 조금씩 긁어냅니다. 톱으로 오려내듯이 줄음질한 자개 문양의 특성상 아주 얇은 선형의 틈이 생기는데, 그 부분을 예리한 도구로 긁어내는 게 이번 작업에서 가장 힘든 과정이었어요. 조금만 힘 조절을 잘못해도 자개가 부서져 버리거든요. 기록을 위해 과정별 시간을 재 본 적이 있어요. 손바닥 안에 들어가는 작은 크기의 작업 한 점을 기준으로 봤을 때, 이물질을 닦아내는 데에 3시간, 밑칠 3시간, 각 자개 간의 높이를 조정하고 문양을 정돈하는 데에 4시간, 나무 위에 붙인 후에 티끌 하나 없이 깔끔하게 이물질을 긁어내는 작업에 보통 6시간에서 7시간 정도 걸립니다. 물기가 마르고 나면 다시 보이는 티끌도 많아서 같은 작업을 며칠간 반복해야 해요. 여기까지가 전체 작업의 50% 정도. 화면이 넓어질수록 시간은 몇 배로 늘어납니다. 얼마 전에 왕십리 자개 공방에 갔다가 긁어내는 과정을 찍은 영상을 사장님께 보여드렸더니 “아이고! 시간 아까워!”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시더라고요. (웃음) Q. 작업하시는 동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신지요.A. 문양의 윤곽을 따라 조금씩 종이와 도료를 긁어낼 때, 마치 흙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발굴해 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아무리 손이 아프고 눈이 침침해져도 종이 아래 숨어있던 모습이 궁금해서 계속해서 작업하게 됩니다. 발굴해 낸 문양 속 주인공이 사슴인지, 말인지, 그것도 아니면 상상 속의 동물 기린인지, 문헌 자료들을 옆에 두고 다른 작품 속 그림과 비교해 가며 이름을 붙여가는 과정도 즐거웠어요. 짧아도 40년, 길게는 60년 가까이 된 자개 도안은 십중팔구 자개 일부분이 삭아서 구멍이 나거나 작업을 하는 도중에 가루가 되어 부서지기 일쑤입니다. 오랫동안 엉킨 채로 쌓여있던 탓에 문양의 일부분이 깨지거나 떨어져 나가 소실된 경우도 많고요. 부서지거나 떨어져 나간 부분을 메울 때는 일부러 기존 자개와 전혀 다른 색상의 자개를 사용했습니다. 결손부를 수리, 보수한다기보다 1970-80년대와 2022년 사이에 떠 버린 시간을 되도록 가시화하고 싶었어요. Q. 지난 전시의 나전 작업을 하셨을 때와 이번 전시의 작품을 만드신 후, 자개 소재와 작업에 대해 달라진 소회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A. 크게 달라질 게 없는 게, 여전히 이 소재에 대해 모르는 것 투성이예요. 지난 작업에서 자개의 은은한 빛과 고요함에 집중했다면 이번 작업은 단단한 소재를 실톱으로 오려내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특유의 표정에 집중하고 싶었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제 작업이 놓일 공간에 반짝임을 한 꼬집 더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어요. Q. 문양에 대한 관찰과 감상이란 측면에서 이번 전시를 어떻게 즐기는 팁이 있을까요? 또 전시를 찾아주시는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말씀 부탁드려요.A. 이번 전시를 위해 『유물즈』, 『뮤지엄 서울』 등을 집필한 김서울 작가님이 「시대와 함께 읽는 나전 이야기」라는 글을 써 주셨어요. 아무런 정보 없이 보는 자개 문양과 작가님의 글을 읽은 후에 보는 자개 문양은 확실히 다를 거예요. 저의 작업 노트와 함께 서울 님의 글을 참고하셔서 각 작업에 사용된 문양이 어느 시기에 완성되었고 어떤 자개가 사용되었는지 추측해보며 천천히 둘러봐 주셔도 좋겠습니다. 공원을 산책하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을 무심코 바라보다가, 작업을 하던 도중에도 “온통 무늬네 무늬야”라고 입버릇처럼 중얼거리곤 합니다.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것은 무늬가 됩니다. 무늬 안에는 염원, 용기, 계절, 시간, 욕망, 사랑이 담겨있어요. 오랜 옛날 장수를 기원하며 새겨넣은 무늬가 몇백 년이 지나 지금의 우리 앞에 있을 땐 또 다른 의미를 붙일 수 있을 거예요. 전시를 둘러보시면서, 그리고 둘러보신 후에도 언제 어디에서든 눈에 띄는 무늬가 있다면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고 나름의 의미를 자유롭게 붙여봐 주셨으면 합니다. Q. 앞으로의 작업 계획이 궁금합니다.A.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밝히기 어렵지만, 내년 오픈을 목표로 진행 중인 일이 세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물건, 하나는 공간, 나머지 하나는 지금까지 도전해본 적 없는 새로운 타입의 작업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 ‘수집’, ‘무늬’, ‘애착’ 이 세 가지 단어가 교차하는 어딘가에서 등을 동그랗게 말고 무언가를 만들거나 쓰고 있지 않을까 합니다. 《무늬예찬 - 남미혜 작품전》은 2022년 12월 11일까지 한남동 handle with care에서 진행됩니다.☞ 전시 소개 자세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