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오• 마주• 봄》 전시에 이어 명주를 다채로운 모습으로 해석하는 정현지 작가와 긴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부드러운 물성에서 단단한 심지를 엿보는 특별한 시선, 매일 한 땀 한 땀 쌓아 올린 작가의 세계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시간이었어요. 2년여 동안 이어진 그간의 작업 과정과 이야기를 여기 함께 나누어봅니다. Q. 안녕하세요. 2020년 《오• 마주• 봄》 전시 이후로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그동안 꽤 바쁘게 지내셨다고 들었어요.A. 《오• 마주• 봄》은 한국에서 제 작업을 보여주는 첫 전시였는데, 감사하게도 그 후 좋은 기회가 닿아 작품을 다양한 공간에서 보여드릴 수 있었어요. 덕분에 바쁘지만 즐겁게 지냈습니다. Q. 지금도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계시는 거죠? 하루 일과와 근황이 궁금해요.A. 대부분 집과 작업실을 오가며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작년 여름에는 제가 다니던 작업실 건물이 철거되면서 공유 작업실로 이사를 했어요. 누군가와 공간을 함께 사용하는 일이 내심 걱정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고민이 무색할 만큼 무척 잘 지내고 있습니다. (웃음) 혼자 작업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종종 시야가 좁아지는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요. 요즘은 다른 사람들과 에너지를 나누다 보니 작업할 때도 긍정적인 영향을 받아요. Q. 좋은 소식이네요. 이번 전시 작품에 관해서도 설명 부탁드립니다.A. 《오• 마주• 봄》에서 집과 벽돌 등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입체적인 대상을 평면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선보였다면, 이번 작품은 기본적인 요소를 반복하고 확장하면서 하나의 공간을 건축하듯 쌓아가는 방향으로 전개했습니다. Q. 반복적 행위. 그 자체에 특별한 의미나 가치를 두고 계신 것 같아요.A. 네. 제가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와도 관련이 있는데요. 저는 어느 날 문득 영감이 찾아와서 좋은 작품이 탄생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같은 작업을 하면서 그날들이 겹겹이 쌓여야만 좋은 결과물로 이어진다고 믿는 편이에요. 이런 마음이 작업에도 자연스레 녹아드는 게 아닐까 싶어요. Q. 작가님 작품 중에서 검은색 블록들이 커다란 흰 천 위에 쌓여 있는 작품을 본 적이 있어요. 평면에 담았던 입체를 다시 밖으로 꺼내신 의도가 있을까요?A. 건물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자 저에게 가장 흥미로운 대상은 ‘벽돌’이라는 개념이에요. 벽돌이 모여 이루는 공간을 이전에는 평면으로 표현했다면, 말씀하신 것처럼 이번 전시에서는 조금 더 직접적인 입체로 표현했다는 차이가 있어요.평면에 옮겼던 구조를 꺼내서 해체하고, 재조립해서 저만의 조형 언어로 만들어 보고자 했습니다. 명주 고유의 반투명한 질감을 다양한 형태와 물성으로 표현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Q. 작품을 보았을 때 현대적인 건축물 같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형태를 구상하실 때 어디서 영감을 얻으셨는지 궁금합니다. A. 특정한 장소나 건축물이라기보다 일상에서 비롯된 것이 많아요.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닐 때 마주하는 풍경이나 창문 너머로 보이는 장면에서 주로 모티브를 얻습니다. 제 상상 속에서 떠오른 추상적인 형상도 있어요. Q. 혹시 작품의 크기를 더 키울 계획도 있으신가요? 작품이 큰 규모라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기도 했어요. A. 네, 이번에는 작품이 그렇게 크지는 않은데요. 구조적인 요소를 만드는 데 어려움이 있어서 쉽사리 크게 가지 못했던 부분도 있고요.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가면 스트레스를 받는 성격이라 큰 작업을 시도하는 데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편이에요. 언젠가는 이런 성향을 극복하고 다양한 스케일의 작업을 해보고 싶습니다. Q. 이번 작품은 다른 명주 작업에 비해 색을 많이 사용하셨어요. 이전과는 달리 표현하고 싶은 점이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A. 명주 고유의 아름다운 결은 유지하면서 여러 색으로 소재가 지닌 또 다른 모습과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빛이 스며들면 색에 따라서 깊이가 변화하는 명주를 관찰하고 표현하는 일이 이번 작업의 즐거움 중 하나였습니다. Q. 색을 선정할 때도 고심하셨을 것 같아요. 선택에 어떤 의도가 있으셨을까요?A. 개인적인 취향을 반영해서 선정하기도 했고요. 빛을 조금 더 잘 흡수할 수 있어서 명주의 반투명한 특성을 부각할 수 있는 색상도 함께 고려했습니다.색은 시각적인 특성도 있지만 물성의 영역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요. 예를 들면 검정은 빛을 가장 많이 흡수하지만, 작품으로 만들면 가장 투명한 색상이 되기도 해요. 어두운 색상의 투명함과 밝은 색상의 불투명성 같은 요소를 적절히 섞어서 작업했습니다. Q. 작품 이름을 지을 때 고려하시는 부분이 있을까요?A. 되도록 단순한 이름을 선택하려고 해요. 각자의 추억이나 감정을 재료 삼아 자유롭게 해석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Q. 앞으로의 작업 계획이 궁금합니다.이번 전시가 끝나면 바로 밀라노 페어에 참여하고, 가을에는 오픈 스튜디오 전시가 있어요. 겨울이 되면 남편과 네덜란드 갤러리에서 듀오 전시를 열 것 같고요. 다가오는 전시를 준비하면서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Q. 많은 곳에서 작가님에게 협업을 제안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한국에 작가님의 팬이 늘어났는데요. 마지막으로 정현지 작가님의 작품을 기다려온 분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립니다.《오• 마주• 봄》 전시 당시에 따뜻한 메시지를 많이 받았어요. 작업에서 느낀 인상을 담아 좋은 말씀을 건네주셔서 자주 뭉클해지고는 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작품을 만드는 일을 알아주시는 점도 고마웠고요. 작품을 보낼 때마다 잘 가서 좋은 추억 많이 쌓으라고 말하곤 해요. 그래서 제 작업이 여러 곳에서 다양한 추억을 쌓아가는 것을 응원해주시는 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가지런히•봄 - 정현지 함창 명주 작품전》은 2022년 5월 11일까지 한남동 handle with care에서 진행됩니다.☞ 전시 소개 자세히 보기 ※ 본 인터뷰는 지역으로부터 가치 있는 물건과 이야기를 전하는 ROBUTER에서 진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