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짙게 물든 가을의 끝자락, 양산에 있는 권혁문 작가님의 작업실을 찾았습니다. 흙과 손이 빚어낸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공간. 《소랑유영小浪游泳》 전시를 앞두고 작품과 작업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보았어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작가님과의 대화를 여기 나누어 봅니다. Q. 안녕하세요. 작업실 너머 그림처럼 흐르는 산의 능선이 아름답습니다. 이곳에서 보내는 일과가 궁금해요.A. 매일 작업과 일상을 오가는 평범한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침에는 아이들 학교를 보내주고 구상해두었던 작업을 시작해요. 야간작업은 결혼하고 나선 엄두가 나지 않더라고요. 생각은 많은데 손이 느린 편이라 시간을 두고 천천히 작업하는 편입니다. Q. 작은 물결을 뜻하는 ‘소랑小浪’은 작가님의 고향인 소랑도에서 착안한 이름이라고 들었어요. 소랑도는 어떤 곳인가요?A. 완도에 있는 마을 단위의 작은 섬이자 제 고향이에요. ‘소랑小浪’은 섬을 둘러싼 바다의 물결이 늘 잔잔하여 붙은 이름입니다. 의미가 좋아서 요장의 이름을 지을 때도 빌려오게 되었어요. 나지막이 흐르는 물결이 긴 호흡으로 차근차근 작업을 이어가는 제 성격과도 닮았거든요. 수결도 ‘작을 소小’ 자를 쓰고 있습니다. 바다를 유영하는 물고기나 날아가는 새의 모습이 떠오르지요. Q. 본격적으로 도예에 입문하게 된 계기도 궁금합니다.A. 대학 시절 우연히 도자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곳에서 첫 번째 스승 격인 형님을 만났습니다. 사람 키만 한 항아리를 만드시는 분이었는데 그 모습이 멋져서 단번에 매료되었죠. (웃음) 졸업 후에는 분청을 하시는 신용균 선생님 밑에서 일하며 도예에 입문했어요. 현장에서 익히는 옛 도제식 방식으로 배웠지요. 만드는 이에 따라 다른 멋이 배어나는 분청이 좋기도 했고, 선생님의 작업 스타일이 저와 잘 맞았어요. 그렇게 5년 정도 일을 하다 2007년에 소랑요를 만들었습니다. 조그마한 터를 구해 시작한 작업장이 벌써 14년이 되었네요. Q. 분청과 백자, 흑유 자기등 다양한 장르로 작업을 이어가시는 점이 인상 깊습니다.처음 배운 것이 분청이다 보니 가장 애착을 두고 손에 익은 것도 분청이에요. 분청 작업은 앞으로 계속 가지고 갈 생각입니다. 흑유 작업은 근래 들어 시작했어요. 이전에는 산에 있는 부엽토를 사용했었는데, 변수가 너무 많더라고요. 같은 유약을 입혀도 베이스가 되는 흙이나 온도에 따라 다른 결과물이 나오거든요. 부엽토의 장점도 있지만 보다 일정한 색을 유지하고 싶어서 흑유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Q. 재료와 형태, 과정은 모두 다르지만 소랑요만의 소담하면서도 경쾌한 멋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분청 작업에 세심히 그려진 꽃과 이삭, 자연의 정경이 아름답습니다.대부분 예부터 있었던 문양을 복각한 거예요. 회화보다는 패턴에 조금 더 가깝지요. 다구는 차를 따르고 마시는 기능이 정해져 있어서 형태가 한정적이에요. 장식은 그보다 선택지가 다양하고요. 기물의 형태를 정할 때 어울리는 패턴을 미리 염두에 두고 작업을 시작합니다. Q. 분청사기 작업에 관해 더 자세히 이야기 나눠보고 싶어요. 덤벙과 귀얄, 상감 등 다양한 기법을 사용하고 계시는데, 분청 작업만의 특별한 매력은 무엇일까요?분청 특유의 포근함과 자연스러운 멋이 있어요. 찻물이 들고, 세월의 흔적이 오롯이 묻어나기도 하지요. 사용하면서 비로소 내 것이 된다는 느낌. 분청을 즐겨 쓰시는 분들은 비슷한 마음일 거예요. 변화가 주는 따뜻한 정취가 있어요. 물론 백자도 백자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고요. Q. 소량요의 분청 작업을 보고 있으면 너른 들판이나 숲이 주는 서정적인 운율이 떠오릅니다.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소량요 분청의 특징이나 차별점도 궁금해요.대부분 한 손에 폭 감기는 크기예요. 처음 분청을 배웠던 선생님과 비교하자면 선생님은 선이 굵고 와일드한 작업을 주로 하셨어요. 요장 운영을 시작했을 때는 그런 거친 느낌으로도 작업을 했었는데, 본래 성향이 점점 작업에 녹아들게 되더라고요. 소랑요 분청은 부드럽고 소담한 분위기가 있어요. Q. 독특한 조형미를 가진 덤벙 그릇에 관해서도 소개해주세요. 하나의 기물이지만 비정형적으로 흐르는 곡선을 좇다 보면 어떤 생명력이 엿보이기도 합니다.다기를 올려두는 그릇이에요. 전통적인 제기(祭器)에서 영감을 받은 형태입니다. 의식용 그릇은 굽이 높거나 귀가 달린 경우가 많은데, 차 마실 때 사용할 수 있도록 형태를 조금 바꾸어보았지요. 물론 원하는 용도에 따라 자유롭게 써도 좋습니다. 장군병도 이전엔 기능이 정해져 있었지만 이제는 화기로도 사용하는 것처럼, 모든 기물은 쓰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용도가 달라질 수 있는 것 같아요. Q.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지향점이나 앞으로의 목표가 있을까요? 목표라기에는 조금 거창하고, 지금처럼 차 도구를 꾸준히 만들고 싶어요. 그동안 소랑요의 작업을 돌아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가 있거든요. 기형도, 재료도, 표현 방식도 미리 의도하고 정해둔 바는 아니었지만 조금씩 달라졌죠. 그저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두고 싶어요. ‘소랑’이라는 이름처럼요. 《소랑유영小浪游泳》 권혁문 도예전은 2022년 1월 15일까지 한남동 handle with care에서 진행됩니다. ☞ 전시 소개 자세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