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빛 그림자가 그리는 무늬가 아름다운 10월. 전시를 앞두고 아이보리앤그레이를 이끄는 왕혜원, 임수정 작가와 서면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두 작가의 일상과 작업, 작품의 모티브에 관해 나누었던 흥미로운 대화를 여기 나누어 봅니다. 안녕하세요, 〈아이보리앤그레이〉의 왕혜원 작가님, 임수정 작가님. 전시로 처음 인사드립니다. 아이보리앤그레이의 소개를 부탁드려요.아이보리앤그레이는 건축디자이너로 일해온 왕혜원과 패션디자이너로 일해온 임수정이 오랜 기간 대화와 영감을 주고받으며 만들어가고 있는 design studio & studies입니다. 왕혜원은 《Becoming》을 통해 건축적 물성과 일상의 순간을 조우시키는 작업을, 임수정은 《leaf's drawing》을 통해 살아있는 풍경과 컬러를 구현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으며 이를 전시를 통해 꾸준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난 2022년에 작업실을 도심에서 서울 근교로 작업실을 이전하셨어요. 온실이 있고 복층구조로 된 공간을 나눠서 작업실로 사용하신다고요. 작업실을 이전하신 큰 이유 중 하나가 숲과 산책로에서 보내는 시간을 더 늘리고 싶다고 하신 인터뷰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요즘 두 분의 일과는 어떻게 흘러가는지요. 작업실 이전의 가장 큰 이유는 외부환경보다는 우선 작업실 공간을 넉넉하게 사용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이 곳에 온 지 3년 정도 지났는데, 다시 조금 더 바람이 통하는 큰 공간으로 옮겨야 하나 고민하고 있습니다.오전에 주로 숲이나 공원으로 산책을 다녀오고 오후에 각자 작업을 시작합니다. 이제는 오전의 산책이 또다른 하나의 작업 과정으로, 오후의 작업이 또다른 여정의 산책으로 순환되며 산책과 작업의 경계가 모호하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작업 테이블에 앉았을 때, 마치 숲 속에 깊숙하게 들어가 혼자 쉬는 것 같은 편안한 안도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이번 전시 제목인 《Vulnerable, Blue, Champagne》을 직접 지어주셨어요. 세 개의 단어가 직관적이면서도 함축적으로 다가옵니다. 제목과 작품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 나눠주실 수 있으실까요? 왕혜원: 서늘한 블루는 겨울로 접어드는, 마음 속 계절의 시간과 삶의 중심이 되는 공간의 관계를 상상했을 때 가장 마음에 새롭게 와닿는 색이었습니다. 일찍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겨울 오후의 서늘한 블루에는 사라짐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한편, 눈이 내리기를 기다리는 듯한 따뜻함과 어떠한 가벼움도 있는 듯합니다. 그러한 연약한 나자신을 마주하는 감성적, 물성적 상태가 지금은 가장 아름다워 보입니다. 임수정: 이번엔 전시 타이틀을 굉장히 드라이하게, 작업내용만을 요약해서 짓고 싶었습니다. 너무 더운 여름을 보낸 탓인지 일체의 은유나 미사여구를 사용하지 않고, 그저 쉽고 담백하고 직관적으로 저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들을 표현한 작업 내용과 작업에 사용한 재료들을 적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왜 ‘연약함’, ‘블루’가 좋게 다가왔을까, 거슬러 추론을 해보니 아마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아름답게 외로운 상태라고 해야 할까요? 다른 생명체의 방해 없이 충분히 연약한 나의 정서적 본성을 즐길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 타인과 명확한 실루엣이 보이지 않는 정도의 서늘한 거리를 두고 살아가고 싶다는 갈망은 예전부터 쭈욱 해오던 생각입니다. 이번 여름 너무나 더운 날씨 때문이었는지…. 그런 생각들이 더 강하게 다가왔고 날씨에 영향을 받아, 어찌 보면 무게감을 두지 않고 움직이는 제자신이 싫지만은 않게 느껴졌습니다. 늘 더 날씨에, 바람에, 빛에, 소소한 것들에 큰 영향을 받는 사람이 되어 갔으면 합니다. 저희가 주목한 ‘연약함’은 이런 의미에 가깝습니다. 샴페인은 이번 셔츠를 만드는 작업 중에 샴페인으로 컬러 작업을 한 작업들이 있었기 때문에 타이틀에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후에 나오는 질문의 답으로 대신할게요. 전시작인 《becoming pieces》, 《leaf’s drawing》는 어떤 정의를 따르거나 정지해 있는 이미지보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의 아름다운 한 순간을 보여줍니다. 문자로 쓴 시 詩 는 발화하는 순간 언어의 사회적 함의가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반면 두 분의 작품에 담긴 것은 우리가 살아가며 우연히 마주하는 시적 장면과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어나 메시지의 억압은 없지만 ‘지금 이 곳에 서서 작품을 바라보는 존재인 나’는 오롯히 감각할 수 있는데 그 감각은 산책과 여행길에서 시선을 빼앗기는 어떤 순간과 닮았습니다. 두 분은 실제로 산책이나 작업실을 벗어난 장소에 가셨을 때 영감을 얻는 편이신지, 혹은 오히려 일상으로 돌아오고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모티브가 떠오르는 편이신지요? 왕혜원: 새로움을 발견하는 순간도 일상에서 그냥 지나치는 생각들처럼 마음속에 묻혀 있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모티브는 마음의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하며 마음이 이끄는데로 실험해 본 습작들에서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임수정: 모든 것이 뒤엉켜 있는 것 같습니다. 최대한 많은 것에서 영감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편이고, 상상하는것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여서 항상 머리속이 여러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산책이나 여행은 영감을 얻기보다는 오히려 그런것들을 다 비워내기 위한 과정 같아요. 그래서 작업을 하기 위해서 거의 매일 산책을 나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돌아와 작업 책상에 앉았을 때, 머리와 마음 속에 잡념이 없고 내자신이 가벼워졌다고 생각되었을 때 비로소 제 손이 시적인 그림을 그려주더라구요. 한편, 두 분은 아이보리앤그레이 라는 이름으로 프로젝트 유닛을 결성하시기 전부터 오랫동안 패션 디자이너와 건축 디자이너로 활동하셨어요. 패션 디자인과 자연, 자연과 건축은 작품 속에서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지 궁금합니다. 예를 들어 패브릭 드로잉 작업을 하시는 임수정 작가님의 작업에서는 패션 디자인을 하실 때의 감각이, 왕혜원 작가님이 비커밍 시리즈에서 다양한 재료를 접목하실 때 건축적인 시각이 연결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왕혜원: 건축디자이너로 일해오면서, 상반적인 재료의 조합이 공간에서 새롭게 형상화되는 것이 늘 놀라웠습니다. 공간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크게 보면 자연의 일부이며, 공간을 형상화하는 것은 작업에서 새로운 자연의 질서를 발견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임수정: 사실 저는 제 작업에서 자연이 큰 화두가 되는 것을 조금 경계하는 편입니다. 자연과 나자신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고 제 작업도 실상은 잎이나 자연의 서사를 담고 있다기 보다는 제 자신의 모습을 담아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것을 큰소리내서 말하는 것이 쑥쓰럽다고 해야할까요?) 패션이라는 범주보다는 이제는 ‘옷을 만드는 작업’에 더 천천히 집중하게 되는 스테이지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가벼운 수의(壽衣)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습니다. 조금 더 나이가 들면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수의와 자연처럼 아름다운 관계가 또 있을까요? 이번 전시에서는 임수정 작가님의 《leaf’s drawing》 작품 중, 패브릭 드로잉에서 셔츠로 확장한 작업을 만날 수 있습니다.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오랜 경험과 아이보리앤그레이로 새롭게 전개해 온 패브릭 작업이 만나는 접점이라고도 볼 수 있을 텐데요, 작업하시면서 흥미로운 에피소드나 기억에 남는 작업 과정이 있으셨을지 궁금합니다. 임수정:《leaf’s drawing》 작업을 해오면서 컬러에 대한 생각이 많이 변해가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샴페인에 장미꽃잎을 넣어, 오랜 기간 발효된 샴페인이 장미꽃잎과 여러가지 대화와 작용들을 주고받으면 만들어내는 컬러 중 원하는 시점의 컬러를 그대로 셔츠에 물들게 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생명체처럼 살아서 변해가는 컬러를 셔츠에 그대로 기억시켰다고 해야할까요? 이런 작업을 하고 나니 예전에 팬톤칩에서 컬러를 지정해서 옷을 만들고 했던 기억들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더라고요. 긴 시간을 필요로하는 작업이라 몇 피스 작업하지는 못했지만, ‘Champagne’을 전시 타이틀에 넣은 이유는 이런 살아있는 컬러들과 교류할 수 있는 작업들을 앞으로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을 전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왕혜원 작가님은 건축적 영감을 다양한 재료로 표현하는 《becoming》 시리즈를 전개해 오셨어요. 마유산의 흙으로 만든 큐브 형태 작업, 파이버 페이스트와 한지로 만든 Paper Cake 코스터, 파이버 페이스트와 아크릴 페인트 작업까지 폭넓은 재료의 융합과 표현 방식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파이버 페이스트와 아크릴 페인트 작업인 《becoming》 시리즈의 새 캔버스 작업을 선보입니다. 작품의 모티브를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왕혜원: 제 작업의 가장 큰 주제는 ‘Becoming’입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Becoming Winter》 작업을 통해 겨울의 풍경적, 정서적 요소인 눈과 얼은 물, 차가움 등을 세밀히 들여다보며 느끼게 되는 감성적 변화와 새로우면서도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형상과 물성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동일 시리즈의 한지 작업은 흙이 떠오르는 색감과 저마다 다른 농담이 독특합니다. 운동성이 있는 바람의 존재보다는 주변을 둘러싸는 공기(Air)의 감각을 상상해보기도 하고, 오래된 시간을 머금은 장소나 공간이 주는 편안함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작업 모티브나 주제가 있다면 이야기 나눠주실 수 있을까요? 왕혜원: 한지는 다른 색감과 재료를 사용하였지만 저에게는 서늘한 블루에서 오는 또다른 느낌과 맞닿아 있다고 느껴집니다. 《Becoming Winter》의 또 다른 한지 작업에서 뷰어들은 어떠한 느낌을 가지실지 궁금합니다. 전시가 끝나고 나면 짧은 가을을 지나 연말을 맞이합니다. 연말과 새해에 계획하신 일들, 새롭게 시작하거나 확장하고 싶은 작업이 있으시다면 소개해 주세요. 왕혜원: 짧은 여행이나 새로운 습작을 많이 하는 연말과 새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임수정: 전시가 끝나면 다른 영역의 작업을 하는 분들과 작은 컬래버레이션을 해보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옷 만드는 작업에 조금 더 집중해서 다음 전시는 옷으로만 작업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이보리앤그레이 작품전 《Vulnerable, Blue, Champagne》는 2024년 10월 25일부터 10월 27일까지, 녹사평 티더블유엘 4층 handle with care 에서 진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