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선을 따라 매화와 개나리가 두런두런 꽃망울을 터트리는 봄날, 김성희 작가님의 작업실을 방문했습니다. 햇살이 비스듬히 쏟아지는 공간에 놓인 모빌들을 바라보며 다가올 《봄은 파랑波浪》 전시를 가늠하고, 그간의 작업 과정을 거슬러오르는 시간을 가져보았어요. 그날의 달뜬 분위기와 대화를 여기 함께 나누어봅니다. Q. 작년 여름에 열린 《Summer Waltz》 전시 이후로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뒤늦었지만 전시를 마친 소감이 어떠신가요?제가 지금까지 만든 모빌을 한자리에 모은 전시이자, 1점씩만 제작한 〈꽃〉 시리즈 중 일부를 처음 소개한 자리이기도 해서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힘든 시기였지만 전시를 준비하고, 또 멀리서 방문해주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어요. Q. 언덕 둔턱에 자리잡은 작업실에서 바라보는 동네 풍경이 정겨워요. 이곳에서 보내는 하루 일과가 궁금합니다.매일 집과 작업실을 오가는 단순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침을 먹고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뒤 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출근이에요. 키우는 식물들을 들여다보고 커피나 차를 마시면서 달력에 적어둔 하루 일정을 체크하며 일을 시작합니다. 제 작업은 정신을 집중하는 시간과 반복적인 노동이 요구되는 일이라 몸의 컨디션에 따라 잘 배분해서 일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일하는 중간에 1시간 정도 동네 산책을 하고요. 마감이 있을 땐 퇴근이 늦어지기도 하지만 되도록 남편과 함께 저녁을 먹고 시간을 보냅니다. 팬데믹 이후에는 여행이 어려워져서 주변 동네 산책이나 옥상에 텐트를 치고 캠핑처럼 노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 됐어요. Q. 다양한 모빌을 꾸준히 선보이고 계세요. 모빌에 특별히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된 계기가 있나요?얇은 나무를 잘라 종이에 붙이는 콜라주 작업을 하면서 동일한 모양의 입체적인 모빌을 만들어보고 싶어 본격적으로 시도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단순한 형태로 시작했지만 만들 수록 호기심이 생기고 작업에 몰두하게 되더라고요. 그 당시 작업실에 창문이 많았는데 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아름다워 자주 창밖을 들여다보곤 했어요. 나무와 풀, 구름. 고양이와 새 그리고 산책하는 사람들까지. 움직이는 모빌에 창밖 풍경을 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오던 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네요. Q. 모빌의 주요 소재로 나무를 다루시는데, 작가님의 사유와 상상을 표현하는 데 나무만의 이점은 무엇일까요?10년 전 우연히 나무로 소품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좋아하게 됐어요. 좋아하다보니 나무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계속 하게 됐고요. 나무는 수종이 다양하고 가공이 쉬운 소재라고 생각해요. 표현하고 싶은 것이 떠오를 때마다 도구도 하나 둘 늘어났는데 그것들을 가지고 직접 작업을 시작할 수 있어 좋았어요.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는 경험이 쌓이면서 마음은 물론 활동 또한 더 자유로워졌던 것 같아요. 나무는 누구에게나 열린 너그러운 재료예요. Q. 열매, 잎사귀, 씨앗, 야생화 등 자연물을 모티브로 한 식물 시리즈를 떠올리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주로 어디에서 영감을 얻으시나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볼 때면 움직이는 대상들을 눈으로 좇게 돼요. 어느 바람 부는 날에는 제자리에서 흔들리는 나무와 풀을 보며 모빌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다양한 형태의 식물을 모빌로 만들게 됐죠. 한편으로는 일상에서 친구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위로하고 돌아온 다음날 책상 앞에 앉으면 그 사람이 떠오르더라고요. 시리즈가 계속되면서 식물의 형태를 사람의 마음과 삶의 태도에 빗대게 되었어요. 〈열매〉 시리즈 역시 함께 같은 파동을 나누고 회복하자는 마음으로 시작됐고요. 말하자면 제 영감은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 같아요. Q.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모빌은 이전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띠는 듯해요. 들풀에서 느껴지는 활기와 자유분방한 멋이 있어요. 지난 겨울 친구가 선물해 준 분재 테라리움을 가꾸면서 흙 냄새와 작은 식물들의 신비로움에 감탄했어요. 분재와 야생화에도 관심을 갖게 됐고요. 겨우내 잎을 떨구고 열매만 남은 나무, 돌에 붙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식물, 제멋대로 자라난 자연스러운 수형의 나무와 야생화. 빛, 바람, 흙에 의존하며 작은 화분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분재와 야생화는 COVID-19 이후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와 닮아 있는 듯해요. 그렇게 생각하니 다양한 모빌의 형태가 머릿속에 그려지더라고요. Q. 땅에 완전히 정착하지 못하고 갸우뚱 흔들리는 모빌의 움직임도 앞서 말씀하신 맥락과 닿아 있는 듯해요.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변화하는 세상과 일상에서 느낀 감정의 변화, 사유들이 자연스럽게 작업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자연이 다양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비정형화된 모습으로 살아가 듯 모빌 조각 역시 움직이는 흙과 돌이 되고, 돋아난 풀과 나무, 휘어진 넝쿨, 익어가는 열매가 되기도 합니다. 바닥면을 돌처럼 둥글게 깎은 모빌이 담담하게 서 있기도 하고요. 이러한 모빌의 변주는 적응하며 살아가는 자연으로부터 배운 게 아닐까 해요. Q. 모빌이 단순한 오브제가 아닌 마음의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돕는 명상의 도구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에센셜 오일을 떨어트려 아로마테라피처럼 활용할 수도 있고요. 특별히 염두에 둔 모빌의 쓸모가 있으신가요?모빌을 바라보는 분들의 마음의 필요에 따라 다를 것 같아요. 모빌을 만들 때 세심하게 신경쓰는 부분 중 하나가 조각들의 연결된 움직임이에요. 단순하면서 다채롭게 율동하도록 설계했고, 연결된 지점의 갯수에 따라 모빌의 움직임이 다양해져요. 반대로 멈춰 있을 때에도 모빌의 형태와 각도가 입체적으로 열려 있게끔 했고요. 꽃과 열매 모빌을 바라보며 공감각적 경험의 시간을 가지실 수 있다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손으로 조각을 만지며 율동하는 모빌을 봐주셨으면 해요. 마음과 모빌의 조용한 조응으로 비움과 채움의 시간이 되시길 바라봅니다. Q. 작가님의 인스타그램에서 “할머니같이 안경을 코 끝까지 내리고” 작업하신다는 글귀가 기억에 남습니다. 묵묵히 방망이를 깎는 노인의 일화도 떠올랐고요. 작업이 이루어지는 동안 어떤 감정과 생각이 일어나는지 궁금합니다. 최근 빈틈 없이 일에 몰두하다보니 내가 언제까지 나무를 만지며 작업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돋보기 안경을 코 끝에 걸친 할머니가 되어서도 오래오래 작업을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작업하던 어느 날, 안경이 내려가 있어 혼자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Q. 체력 소모도 상당할 것 같아요. 나무를 깎을 땐 무의식적인 반복 노동의 시간이라 정신적인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기도 해요. 복잡한 감정이나 생각을 걷어내고 손의 감각과 행위에만 집중하며 되도록 다치지 않게 작업을 하려고 합니다. 점점 단단해지는 팔 근육과 손바닥의 굳은 살은 다음 과정의 작업을 할 수 있게 해주는 흔적인데, 할머니가 되어서도 이 일을 지속하려면 체력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할 것 같아요. Q. 앞으로의 작업과 계획이 궁금합니다.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만든 작업물은 다음을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매일 작업실에서 다음 작업물을 그리고 만들어볼 거예요. 어떤 것을 만들게 될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자연과 가깝고, 사람과 연결되면서 나를 마주하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체력적으로 지치지 않도록 당분간 휴일에는 작업실에 출근하지 않을 계획입니다. 《봄은 파랑波浪》 김성희 작품전은 2021년 4월 18일까지 한남동 handle witch care에서 진행됩니다. ☞ 전시 소개 자세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