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림백산百林白山

박종민 도예전


녹음이 짙어지는 7월, 경북 봉화에서 17여 년간 도자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박종민 작가의 도예전 《백림백산百林白山》을 시작합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초기 다완 작업부터 수묵 세필화를 담은 백자 다관까지, 작가가 오랜 시간 묵묵히 쌓아올린 도자 작업을 선보입니다.

박종민 

2007년 도예에 입문한 후 백자와 분청, 흑유 등 다양한 도자 작업을 전개합니다. 우리나라의 흙과 원료를 찾아 태토와 유약에 대한 연구와 실험을 이어가는 한편, 손수 빚은 도자에 섬세한 필치의 묵화로 자연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Q. 이번 전시명을 직접 지어주셨지요. 전시명 《백림백산 百林白山》에 담고자 했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A. 언젠가 새벽 어스름에 백자 항아리며 완, 그릇들이 제각각의 모습으로 어울려 하얀 능선처럼 포개진 풍경을 보았습니다.


‘백산(白山)을 언젠가는 쌓아 올리겠구나. 그 즈음이 되면 내 작업들을 두고 지금보다는 덜 부끄러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직은 백산으로 가는 길목에 작은 숲 하나(白林) 정도 만들었다고도 못하지만, 긴 여정의 목표와 함께 현 지점을 바라보는 제목으로 ‘백림백산’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백산(白山)의 경치 속으로 들어가면 마냥 백색의 세계일 수는 없을 거에요. 다양한 생태와 생물들이 한 데 모여 하나의 큰 세계를 이루는 거니까요. 백림(白林)은 그래서 백림(百林)이기도 하고, 백산(白山)은 언젠가 백산(百山)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Q. 푸른색이 선명한 초기의 청화 작업 이후 근래의 청화백자는 수묵화에 가까운 느낌을 줍니다. 맑고 부드러운 농담과 자연스러운 미감에서 언뜻 동양화도 떠올랐고요. 주로 어디서 영감을 얻으시나요?

A. 청화를 전공하던 학교 분위기가 참 엄했어요. 도안에 새나 곤충 등의 생물보다 배치가 어려운 꽃과 식물을, 도안화하지 않고 직접 산과 들로 다니면서 사생하며 자연 속의 모습 그대로를 옮겨 그리도록 했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이 작업을 그대로 이어갔는데, 스케치를 위해 밖으로 산책을 하고 걷는 일이 많아지면서 제가 사는 주변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구요. 구석구석 다가가고 엎드리거나 쪼그려 앉거나 나무를 타는 일들이 모이다보니 주변이 전체로, 한 그림으로 보이기 시작했어요. 


이후 풍경을 잘 그리고 싶어져서 예전의 그림들을 공부하고 모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산수화에서는 산수화의 약속이랄지 기호가 있으니까요. 언젠가는 제가 접하는 풍경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요.

가끔 흙이 충분히 좋은 백자에는 낙관조차 남기기 싫어질 때가 많아요. ‘이런 기물에 굳이 그림을 그려야 한다면…’ 하고 생각하면 점점 그림이 그렇게 변해가더라구요. 특히나 찻자리 기물이기에 그림이 좋은 느낌으로 남되, 차분하고 조용한 시간에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방해가 되지 않았으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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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세필로 한자를 적은 다관과 찻잔이 독특해요. 이 중에는 불가에서 쓰이는 문구도 있고, 가마의 소성 분위기와 흙의 정보, 유약 이름을 3열로 적은 것도 있습니다. 한문을 적은 기물을 통해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있을까요?

A. 어떤 분들은 잔에 한자로 글자 몇 자 적어달라고 말씀하세요. 어떤 한자가 좋으시냐 물어보면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면 적당히 괜찮은 글귀들을 찾거나 하는데요.


가령, 이번에 출품된 잔 중에 ‘심화노방'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고 반대쪽에는 한 송이 꽃이 그려진 잔이 있습니다. 한 송이의 조용한 꽃은 차분하고 조용한 느낌을 주나봐요. 밤에 혼자 찻자리를 가질 때 적당한 어둠 속에서 이 잔 하나를 놓고 가만히 바라보는 시간이 좋다는 말씀을 어느 분이 해주셨어요. 차를 안 마시고 그냥 그렇게 바라보신다고 해요.


이 내용을 듣고부터 무의식중에 조금 길쭉하니 호젓한 꽃을 그리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아마도 촛불의 이미지를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아요. 찻자리가 일상에 휴식이 되거나 일상을 살아가는 힘이 된다면, 기물도 그러했으면 좋겠거든요.


이 잔이 없는 곳에서도 잔상으로 마음에 남아 한 가닥 꽃으로, 혹은 마음 속 어둠을 물리는 불빛으로, 그렇게 작용할 수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심화’라는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心火, 心花 어느 쪽이나 같은 의미가 되더라구요. 


Q. 전시를 찾으시는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A. 이번 전시에 준비한 기물들은 정말 다양하고 저마다의 빛깔이라서 개인전이 아닌 단체전을 보시는 느낌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중에는 실험에 가까운 작업으로 만들어진 한 점 작업, 멋지지만 용도에는 맞지 않는 작업, 다완이라고 만들었지만 안울이 좁은 그릇도 있어요.


기물을 나누는 기준은 불량과 불량 아닌 것들로 분류될 수 있겠지만 저는 그 또한 불량으로 볼 수 없어 아끼는 기물도 있습니다. 가령 ‘퇴수잔’의 경우 개완을 만들면서 여유 있게 만들어두었던 컵 부분으로 뚜껑이 모자라 그대로 완성된 ‘잔’입니다. 제 다관에 한 점의 잔으로 심플한 구성이 가능했고, 넉넉한 잔으로 잘 사용했었지요. 급하게 손님을 맞아야 했던 때에 잔버림용 퇴수기로 사용해보고는 이 잔의 용도는 퇴수잔이 되었습니다.


전시를 찾으신다면 기물의 가격이나 용도 등을 한 켠에 미뤄두고, 한 점 한 점 위아래와 앞뒤를 찬찬히 살펴봐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저마다의 상상으로 백 가지 숲을 만들어보는 자리가 된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습니다.

끊임없는 시도와 변주의 과정을 통해 완성한 기물들은 고유한 생김과 저마다의 수형의 나무가 모여 이룬 숲(林)의 정경을 떠오르게 합니다. 만물을 포용하는 숲을 거닐듯, 작가가 이룬 백산(白山)의 경치를 만나는 자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2023년 7월 13일 - 8월 6일

Tue - Sun, 12 - 7 PM (Monday Closed)  

서울시 용산구 대사관로 43 1층 Handle with Care

02-797-0151

전시 기획: Handle with Care

포스터 디자인: 이재민

식물 연출: 보타라보 정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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